때로는 관조할 수 없는 그림이 있다
《반도 엘레지, 레퀴엠》(2024) 서문
이슬비(독립기획자, 미학관 디렉터)
PENINSULA ELEGY, Requiem Installation,Philosopher's Stone, 2024 ⓒ사진 최철림

 애도는 그 사람을 잊기 위한 작업이다. 자아가 상실한 대상에 대한 마음을 다시 자신에게로 회수하기 위해 우리는 애도의 기간을 갖는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자아, 즉 주체는 마치 자신을 잃은 것만 같은 괴로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애도는 그 슬픔의 기간이자 곧 상실한 대상을 잊어가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애도
의 중심은 대상을 상실한 주체에게 있다. 그는 언젠가 이 일을 잊고, 죽은 자를 잊고, 그의 얼굴을 잊고, 그의 온기를 잊고, 그의 표정과 말투를 잊고,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잊고, 다시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상실의 슬픔에 빠진 누군가를 위로하곤 한다. 그것은 누구에게 향하는 말일까. 이는 살아있는 사람 혹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자 동시에 죽은 이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고와도 같다. 부디 세상을 잊고,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을 잊고, 망자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 시간. 애도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에게서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잊기 위해, 서로의 세상이 이제 더 이상 같지 않음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므로 애도의 목적은 망각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는 망가져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애도를 끝내지 못한 주체는,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실패한 주체는, 그것에 짓눌러 일상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해진 주체는, 그대로 슬픔에 잠식되어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프로이트는 이를 우울증의 증상으로 보았다.
 ‘엘레지(elegy)’는 이때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때때로 비가(悲歌)라고도 불리는데, 슬픔에 잠긴 노래 혹은 비탄을 표현한 시 등이 여기 해당한다. 이렇게 애도와 우울증의 관계는 주체가 대상에게 보냈던 마음을 얼마만큼 다시 자신에게로 회수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애도에 성공할 경우 우리는 망각이라는 자유를 얻지만, 그것에 실패할 경우에는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둘 사이에서 대상에게 향했던 마음을 정확히 정리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완전한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더욱이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이의 상실을 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는다는 것과도 같기에, 애도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애도는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치명타는 그동안 사회적 사건과 사고의 장면들을 그림에 담아왔다. 총 25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종이 아래〉(2022) 연작부터 〈재난 위장술1-3〉(2024)까지, 치명타의 그림은 사회적 재난의 기억들을 다시 소환한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팬데믹 시기에 드러난 이 사회의 이면들. 이 사회가 겪은 재난의 기억은 공동체 공통의 트라우마로 남겨진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면 마주하기 어려운 사회적 재난의 현장들은 국가의 정치적 한계와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무력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국가적 재난 참사에 대한 애도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서 사회 내부에서 작동하는 정의와 맞물리기 때문에 슬픔의 감정 이상의 층위를 갖는다. 개인의 애도가 슬픔이라는 감정에 집중되어 있다면, 국가 재난에 대한 애도는 슬픔의 감정과 함께 이를 개선해야한다는 어떤 이성도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재난에 맞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원하고, 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지켜봐야 하는 어떤 의무를 갖고 있다. 
 10·29 참사 이후 시민들이 남긴 포스트잇 메시지는 ‘이태원 기억 담기’라는 활동으로 보존되고 있다. 치명타는 〈너무 미안하고 당신들이 세상을 바꿨어요.〉(2024)라는 작업에서, 그 포스트잇에 담긴 메시지를 그대로 다시 그린다. 포스트잇의 내용이 곧바로 작업의 제목이 되는데, 이때의 글씨체, 맞춤법, 필압, 포스트잇의 구겨진 상태 모두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나아지지 않는 나를 데리고 산다는 건.〉(2024)과 〈울지 않겟습니다. 그러나... 울 것입니다...〉(2024)도 마찬가지이다. 포스트잇 메시지에는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유족들에게 보내는 위로, 그리고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 담겨 있다. 망각이라는 일종의 자유, 어떤 해방을 부정하는 행위, 사회적 재난에 대한 애도는 이렇게 오히려 기억하기를 강조한다. 이것이 개인의 애도 작업과의 차별점이다. 
 울음을 삼키고 꾹꾹 눌러 쓴 글씨, 그 사람의 맞춤법과 어투가 포함된 필체는 생각보다 많은 단서를 담고 있다. 글씨를 남긴 사람에 대한 여러 정보가 관조를 가능하게 만드는 거리두기의 실패를 가져온다. 우리는 재난을 관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재난을 스펙터클의 일부로 소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대에 재난에 대한 애도는 〈한 사람의 한계와 최선〉(2024)으로 남는다. 뉴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 중 하나로, 세상의 물리적 거리가 기기와 매체를 통해 복잡하게 뒤엉켜버린 이후, 이미지는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이 이미 그 형식 자체가 소비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치명타의 그림 중 몇몇은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들, 기억들의 일부를 다시 붙잡는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죽음에 다 같이 슬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의의 사고에 함께 눈물 흘리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공동체가 지닌 일말의 인간성이 발현되는 지점이 아닐까. 슬픔을 마주한 공동체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애도기간 같은 것이 아니다. 애도는 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이 끝나면 마무리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도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남기에 미래의 어느 순간에 불현 듯 도래하는 사건과 같다. 그것에 연민으로 대응하는 국가가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닌지 혹은 감정을 앞세워 진실을 호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한다. 누군가의 슬픔의 감정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은지. 수전 손택의 말을 빌어,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바보가 되지는 말자.”
 /이슬비
⑴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프로이트 전집 11: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박찬부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4. 
⑵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반이성적인 정치적 대응에 대한 수전 손택의 비판. 당시 백악관의 부시 행정부는 이를 두고 문명 혹은 자유세계에 대한 공격이라는 등 자유, 문명, 인류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데 급급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