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넘는 종이
치명타의 <Under the Paper 종이 아래>(2022) 리뷰
허호정(큐레이터, 필자)
Under the Paper Installation, Post Territory Ujeongguk, 2022 ⓒ사진 안부

 기억은 무력하다. 특히 잃어버린 대상에 관한 기억의 무력함은 자주 확인된다. 그것은 대상의 부재를 계속 환기하는 동시에 현존에의 요청, 과거로의 회귀에 매달린다. 하지만 기억에 기대되는, 현존과 과거를 지금 여기에 불러오는 일은 매번 실패한다. 거기에는 살아있음의 흔적이 없다. 이곳의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와중에 기억은 또 퇴색한다.
어떤 상실을 두고 오로지 기억만으로 응수하는 일은 어리석으리 만치 무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마다 기억을 이야기한다. ‘세월호 이후’로 정의되는 시간 아래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기억을 불러 세우고 그 말을 반복해 왔다. 그리고 오로지 그것만 했다. 기억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는 데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기억은 그날의 사건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사유할 힘을 잃도록 만든다. 초현실적이기까지 했던 긴박함,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사람들, 그를 결국 잃은 가족들, 수장(水葬)의 진행 과정을 생중계하고 있는 TV와 그 앞에 망연히 앉아 있어야 했던 우리 모두를 떠올리기에, 기억은 그 자체 역부족이 되어 갔다. 그것은 얼마 전만 해도 눈물과 분노를 소환하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억의 문제는 이미지의 차원에도 그대로 포개어진다. 우선, 기억으로 기능하는, 기억의 보존을 자처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사진은 그러한 종류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사진에는 상실된 대상이 담겨있다. 그것도 살아 생전의 존재를 그 자리에서 바로 포착한 결과가 사진이 된다. 그렇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보는 이는 사진 속 형체가 결코 내가 알던 그 존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역시 기억의 무력함인가?) 사진 속 얼굴은 내가 알던 존재의 작은 습관, 솜털을 곤두세우고 그의 이맛살에 주름을 만드는 표정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얼굴은 더 격렬하게 그 존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 사진 속 형상이, 내 옆에 있던-사라진 ‘그’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기억이 스스로의 무력함을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서둘러 말하자면, 기억 그 주위로 다른 행동들을 동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행동이란, 기억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정체들을 밝히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다. 상실의 사건을 초래한 것들, 상실의 사건이 야기한 것들, 상실의 대상과 맺은 관계, 상실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태도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정의하며 반성하는 일로부터 행동은 시작된다. 다시 질문은 이미지에게로 넘어간다. 이미지는 상실에 관하여,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존재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억을 넘는 이미지란 가능한 것인가? 이미지는 과연 행동의 차원을 열어 젖힐 수 있을까? 
치명타는 이번 개인전 《Under the Paper 종이 아래》(탈영역우정국, 서울. 2022)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 작가는 낱장의 종이에 채도 높은 색의 물감을 물에 희석하여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는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이미지로 풀어낸다. 대개 그것은 상실의 이야기이며, 상실에 직면했거나 상실의 전조를 감지하거나 상실 이후에 남겨진 - 현상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은 서사를 정확하게 담기를 의도하지 않고, 어떤 인물이나 대상을 또렷이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증언이나 기억을 위하지 않고, 애도에 특정한 형태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다만, 잃어버린 존재에 관한,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기에 관한 이미지로 작동하려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첫째로, 치명타의 그림(〈종이 아래〉 연작(2022))은 기억의 메커니즘을 따르거나 환기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형상들은 훨씬 우의적인 방식으로 제안, 조합되고, 이미지는 이미지로 작동된다. 가령, 트래픽 콘(traffic cone)에 둘러싸인 가운데로 솟아 펼쳐진 우산과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크림빵과 우유 한 팩, 이방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의 입 안에 든 나무둥치, 병상 하나를 뚫고 지나가는 거센 물살, 세상을 지탱하고 선 빨간색 펜. 이것들은 치명타의 그림에 나타난 모방적으로 그려진 도상의 목록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눈앞의 시각적인 형상을 내가 아는 말로 풀어내는 일과는 별개로, 이 도상들은 말로 된 언어의 의미체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언어의 의미체계가 단어와 단어들 사이에 맥락들을 엮는 것과 달리, 한 평면 위에 놓인 형상의 단위 단위는 맥락이 여물도록 재촉하지도 물론 그 일에 성공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보는 이가 저 그림들에 그려진 ‘알 법한’ 형상들이 만들어내는 의미를 자꾸 찾아내고 싶어하는 것이고, 평면을 계속해서 마주한다 해도 서사를 쉬이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치명타가 그려내는 이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의 구조와 도상들이 현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전에, 현실에서 보았던 무엇의 잔상을 포개면서 그것을 의미화하기 시작한다. 다만, 잔상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지나간 시간의 이미지가 현재의 이미지 안에 겹치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발견한 이미지는 나중에 마주할 또 어떤 이미지와 연동할 것이다. 보는 이는 안으로 밖으로 폐쇄된 장치(트래픽 콘)에 둘러싸인 우산 아래 인간(노숙인)을 상상할 수 있고, 보급된 간편한 식사(크림빵과 우유)에 의지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사망자 현황 집계가 가속하는 동안 잊힌 하얀 시트의 병석(침대를 통과한 물살)과, 그 위를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또, 코로나19의 직접적 영향 아래 한 순간 생업을 잃게 된 방과 후 교사나 방문학습지 강사(빨간펜), 마스크 안쪽에 감춰둔 자신의 역사를 밝힐 수도 거기에 무언가를 호소할 수도 없는 이방인. 그런 존재들을 전에 본 어떤 이미지들에 비추어 연달아 떠올리게 된다.
또 한 가지, 《종이 아래》의 그림들이 갖는 특징적인 지점이 있다. 그것은 ‘초상화’라는 양식이다. 초상화는 하나의 프레임에 정확히 한 인물을 그려 넣는 게 대부분이다. 대상이 정면/측면 등 방향을 정하고 서서 (그림을 응시하는 자의 눈을 마주치도록) 구도를 잡은 ‘초상화’의 양식은 사진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이후에는 사진으로 고스란히 옮겨갔다. 이때, 본 전시의 상당 수 그림들이 크지 않은 종이에, 프레임 안 가득 한 인물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언급해야 하겠다. 이 인물들은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최대한 보는 이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 중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1,560,000원〉, 2022), 병상에 누운 사람(〈10시간〉, 2022), 마스크를 쓰고 길 한복판에 선 사람(〈6배〉, 2022), 코로나19 임시 선별 검사소 앞에 선 사람이 있고(〈7일〉, 2022), 어깨와 등에 들러붙어 그 자신을 불러 세우는 손길들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이 있다(〈종이 아래〉, 2022).
특기할 만하게도, 고인이 된 이의 초상 사진을 들고 있는 인물의 ‘초상화 가 있어 주목된다. 전시장 한쪽 벽을 차지한 세 점의 그림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그려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상화 양식’이 대개 한 사람을 대상 삼는 것에 견주어 볼 때, 이 그림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초상화의 대상 인물의 가슴팍에 있는 또 다른 초상(영정 사진) 때문이다. 결국 이 그림, 〈종이 아래 (3점의 인물화 유닛)〉에는 한 명의 인물과, 그의 품에 있는 흐릿한 영정사진 속 주인공이 함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림은 그 자체 애도로 기능한다. ‘애도’란 어떤 타자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과 그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흔히 얘기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어떤 타자의 죽음’이 왜 ‘나’를 뒤흔드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생각하는 대목이다. 총체적인 슬픔은 타자가 주체의 한 부분에 귀속했던 때문에 발생한다. 즉, 타자의 상실은 주체 자신의 일부를 상실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상실은 주체 내면뿐 아니라 그가 몸 담은 세계의 영원한 변화를 초래한다. 〈종이 아래 (3점의 인물화 유닛)〉은 분명히 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 양식을 취하지만, 그 인물은 본래 타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그림이다. 그것은 상실의 문제를 직면하게 하는 애도의 역할을 맡는다. 
작가 치명타는 그림에서 각각의 이미지가 오로지 이미지로 드러나게 하면서, 그것을 보는 이가 그 배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기를 의도한다. 의미가 완전히 영글지 않는, 그러나 구체적 형상의 파편적 조합의 힘을 믿으며, 보는 이가 일상에서 자주 목도했던 또 다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겹쳐 보기를 제안한다. 나아가 각각의 그림이 암시하고 있는 상실에 대해, 상실의 사건 전후를 맥락화 해보기를 권한다.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종이 아래’가 이 그림들의 중요한 물리적 성질을 가리키는 동시에, 행정 서류 한 장에 의해 삶의 기로에 놓였던 이방인, 환자, 장애인, 노인, 노숙인 들의 가혹한 현실을 지시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것이다.
끝으로, 이 많은 초상화들 앞에 펼쳐진 커다란 ‘국화’ 그림(〈무제〉, 2022)을 언급해야 하겠다. 이 작품은 삼면의 패널로 설치되어, 전시 공간 전체와 관객을 감싸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무제〉(2022)는 채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시된 다른 그림들과 또 뚜렷이 구별된다. 작가는 이 그림을 위해 색을 최대한 자제하고 오로지 검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형상을 계획했다. 그리고 역시 다른 지지체를 대지 않은 낱장의 종이 위에 작업을 진행했다. 얇지만 면적을 넓힌 종이는 습도, 온도, 빛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변형된다. 습도가 높아지면 종이는 우그러들고, 높은 온도와 직사광선에 노출되기까지 한다면 하얀 바탕면은 색이 바래고 변형된다. 비교적 짧은 전시 기간 동안 이러한 변형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작가는 그 과정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변화가 가시화되었다면, ‘국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즉, 추모와 기억의 역학을 더 돋보였을 것이다.
얇은 종이에 의탁할 뿐인 그림은 분명 나약하다.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너무 쉽게 스러지고, 적극적인 ‘행동’과도 거리를 갖는다. 그러니까 누군가 이 종이들을 두고, 이미지 및 (소위) ‘예술’이 얼마나 무력한지 이야기하는 데 온 시간을 할애한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힘은, 다른 차원에 있다.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이에게 상상을 매개하고 적극적 앎을 유도하며, 그에게 기억을 넘는 행동을 촉발시킨다는 데 있다. 이미지는 무언가를 들어올리고, 움직이게 한다. 치명타의 그리기는 그런 작은 소망의 행동을 포함한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