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타의 〈실바니안 패밀리즘〉: 소수자 정치를 불러 모으는 꼭두극
채희숙(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Sylvanian Familism Screenshot, 2019

‘실바니안 패밀리(Sylvanian Families)’는 1950년대 영국 교외에 살고 있는 중산층 가족의 생활을 컨셉으로 1985년부터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 캐릭터 인형이다. ‘실바니아(sylvania)’는 라틴어로 산림지를 뜻하는 단어로, 실바니안 패밀리란 ‘숲 속에 사는 가족들’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많은 시리즈를 거느리고 있는 이 인형들은 전세계 남녀노소에게 사랑받고 있다. 실바니안 패밀리는 보통 4인 가족 세트로 판매되는데, 아빠, 엄마, 아들, 딸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은 관습적인 성역할을 그대로 재현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실바니안 시리즈를 이용한 인형놀이들을 볼 수 있다. 또 넷플릭스에서는 실바니안 패밀리 미니시리즈를 서비스 중이다. 실바니안 패밀리는 소위 정상가족을 모델로 한 전통적인 가족 역할극에 어울리는 세계관을 확장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재생산한다.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중에서 패션쇼를 하게 된 토끼에게 친구들이 꿈이 뭐냐고 묻자 토끼는 실바니안 마을처럼 반짝이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일화에서 반짝이는 것은 백화점이다. 또 세 동물이 모여 초콜릿을 먹으면서 달콤한 데이트를 상상한다. 로맨틱한 데이트를 기다리는 소녀들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회차에는 ‘걸파워’라는 키워드가 붙어있다. 한편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실바니안 패밀리 아이템들을 가지고 인테리어 놀이를 선보이는데, 그 놀이과정은 자연스레 부속 아이템인 조명 등 주변 집기들을 환기시킨다. 이처럼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과정에는 소비주의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반짝이는 꿈은 패션의 연장선에서 상상되며 배타적인 가족 개념 속에서 실현되는 사랑의 가치는 피규어 수집으로 지탱된다. 놀이문화로서 실바니안 패밀리 인형놀이는 동화적 세계를 습득하여 무해한 곳으로 매끈하게 포장된 세계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하는 장치다.
동화적인 세계에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나 고정된 성역할을 재생산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행동이 늘고 있다. 미디어 영향력을 가진 헐리웃 연예인들이 <신데렐라>나 <인어공주> 등의 동화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달되기도 하고, 전래동화를 변형해 다른 가치관을 전하는 창작동화들도 출판된다. 이들은 성인지감수성을 갖지 못한 동화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문화교육에 저항한다. 한편 최근의 디즈니는 이런 비판적인 시선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보수적인 가치관 재현의 대명사였던 디즈니는 <주토피아>(2016) 등에서 여러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이 갈등 없이 어울려 사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겨울왕국>(2013)에서는 엘사의 능력을 해방시켜 걸파워를 북돋고 자매애, 즉 여성연대를 실현하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공주는 디즈니 왕국에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매끈한 동화의 세계에서 뛰쳐나왔고, 디즈니는 재빨리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관과 현대의 정체성 이슈를 괴물처럼 흡수하여 21세기 버전으로 매끈해진 뉴 디즈니 왕국을 건설 중이다.
치명타의 <실바니안 패밀리즘>(Sylvanian Familism, 2019)은 위의 방법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동화를 극복한다. <실바니안 패밀리즘>은 정상가족 모델을 재현하는 실바니안 패밀리의 이미지를 비틀고 전복하는 인형극 퍼포먼스로, 여기서 재현되는 사회환경은 결코 안전하거나 매끈하지 않다. 이 인형극은 배타적인 성역할을 습득하고 있는 인형놀이와 매끈한 세계의 이미지를 어지럽힌다. 우선 실바니안들은 4인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연대공동체를 이루는 소수자다. HIV 감염인, 장애인, 난민, 성소수자 등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폭력과 대면하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만난다. 이 만남은 국가 복지 또는 안전 시스템, 그리고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담론, 일상의 편견 등이 부과하는 폭력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인형들은 4.16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사회가 어디서부터 누구와 함께 안전한 삶을 모색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외진 곳에 고립되어 배타적인 마을을 꾸린 숲 속 가족의 환상을 뒤로 하고 위험한 실제 사회에 발을 디딘 실바니안들은 그 위험을 함께 헤쳐 갈 친구를 만난다.
다섯 개의 일화에서 다양한 설정들이 세심하게 고려된다. 첫 번째 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은 카페 화장실 쓰레기통이다. 익명성을 띤 개방적 공간에서의 만남과 은밀하게 감춰지고 사회에서 고립되는 구체적인 존재가 대비된다. 카페는 정말 온갖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그리고 카페 화장실이란 온갖 것들이 버려지고 뒤섞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매우 활발하게 이 공간에서 마주치고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피, 타액, 분비물을 보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활발하게 뒤섞이고 만나는 공간의 쓰레기통을 통해 치명타는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진 영역을 들춰낸다. 내몰린 존재로서 HIV 핏방울은 작고 수줍기만 하다. ‘피의 대화’는 가차없는 시선에 맞서서, 편견에 불과한 그 시선이 편견의 대상이 되는 이를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이야기를 가차없이 되돌려준다.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PPL를 언급하며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시키는 썰렁한 농담들은 덤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장애 복지 문제를 다루는데 스펙타클한 사연 대신 ‘내 맘대로 먹을 수 있는 수요일’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문제의식, 즉 일상의 권리를 통해 전한다. 폭력적인 사연의 전시를 통해 불쌍한 존재로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본이 되는 생활의 자유를 권리로 주장하고, 이는 장애 문제를 대상화하는 우리사회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성찰하게 한다. 더불어 큰곰의 존재는 타자와 마주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공포를 드러낸다. 이 일화는 아빠의 판단-그러나 이 역시 무작정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이미지보다는 많은 비장애인이 가질 법한 상투성을 재현하는-에 맡겨진 고슴도치가 탈시설을 선택한 친구를 보면서 아빠에게 먼저 질문을 시작하는 모습에서 마무리된다. 고슴도치에게 카메라가 다가가 그가 먼저 발화를 시작하는 것에 주목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타자를 위험한 존재로 재현하는 이미지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새롭게 주목되는 이미지는 선택의 권리를 가지고 스스로 고민하는 주체의 모습이다.
세 번째 장은 난민을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는 난민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일화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슈의 중심에 있는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 장이다. 대신 주류 미디어 및 언론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담론을 거쳐 난민 이미지가 생산 및 확산된다. 우리 사회에서 난민은 아직 구체적으로 표상되지 못한 비가시적 존재이며, 이들을 선규정하는 시선만이 가시화되어 있다는 진단이다. ‘진짜가짜진실거짓’을 판명하는 목소리 또한 HIV 핏방울처럼 작은 아기 수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이 수달은 소수자의 조건 대신 언론과 미디어를 비판하는 역할로서 작지만 그 목소리가 거침없고 당돌하다.
네 번째 장에서 성소수자의 안전할 권리는 실질적으로 배제되며, 이러한 차별로 인해 퀴어의 ‘레인보우 써머’는 위험에 노출된다. 법적으로 승인되는 가족관계 바깥의 생활공동체는 국가에 의해 전혀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의 위험은 좀비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발생한다. 여기서 좀비는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다. 좀비들은 국가로부터 배제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하는 성소수자 커플의 사연에 공감하며 이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국가가 보호하는 영역 바깥의 존재들에 대한 이 작품의 관심과 애정이 읽힌다. 이 일화는 성소수자와 더불어 좀비를 만들어낸 혐오 시선도 의심하고 문제시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살아남은 이 작품의 모든 인형들이 음악회에 참석한다. 음악회가 열리는 카페는 이전의 은폐된 익명성 대신 실바니안 패밀리 세계에서는 결코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이들이 만나고 대화하며 연대관계를 여는 장소가 되었다. 자연의 가치를 소중히 한다지만 숲 속에 아이템 가득한 마을을 세우고, 사랑을 중요시한다지만 편협한 성역할에 기반을 둔 가족관계 안에서만 사랑을 나누는 실바니안 패밀리 이미지에 반대하며, 이 마지막 일화는 소수자들이 국가폭력 및 사회적 차별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소박하지만 안전한 ‘허들링(Huddling)’ 공간을 건설한다.
총 다섯 개의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문제들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이들의 배치는 임의적이거나 병렬적이기보다는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다. 순서대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도시의 익명적인 공간, 또는 친밀한 관계 아래에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배제와 차별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된 <실바니안 패밀리즘>은 공적 시설 및 기관의 문제로, 언론 및 국가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가 비가시화하려는 문제의 지도를 확장해간다. 그리고 이는 4.16으로 이어지면서 우리가 안전하게 살 권리의 문제와 국가 폭력 비판으로 나아간다. 살아남아 서로 위로하고 연대하는 소수자들의 공동체 이미지는 가족 대신 친구-동료, 국가 대신 자율적으로 구성된 안전한 공간을 기반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꼭두극이라고 불려온 인형극은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형상화한 대체물을 통해 인간사회를 재현한다. 단순화되고 정형화된 형상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유형들을 손쉽게 인지하도록 돕는다. 치명타는 이전 작업에서 유튜브 플랫폼을 이용하여 우리 사회의 화장술, 그 사회적 가면을 해석하고 그 이미지들에 도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영상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우리가 정상가족 모델 속에서 욕망하고 있는 모습들을 재현하고 있는 일종의 가면, 정확히는 매개 이미지가 전복되고 있다. 그런데 지난 작품이 아주 복잡한 우리의 얼굴에 직접 행해지는 도전이었던 반면에 이번 작업은 표정을 갖고 있지 않은 캐릭터 인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표정이 없는 꼭두각시 인형들은, 다큐라면 등장과 함께 이루어질 커밍아웃으로 얻을 법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좋으며, 픽션이라면 흉내내기를 통해 어쭙잖게 우리가 가진 시선의 한계를 반복할 만한 오류도 적다. 관습과 편견이 즉각 작동하게 만드는 얼굴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인형극은 소수자 인권 문제를 전하는 스피커로서 좀 더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인형은 예로부터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놀이대상이자 영혼을 담고 있는 영물이었다. 그것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는 경계 사물로서 영혼을 매개한다. 실바니안 인형들은 정상가족에서 소수자 연대체들로 영혼을 바꾼다. 같은 인형에서 다른 정체성이 생산되는 것이다. 좀비가 공포스러운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때문이 아니다. 좀비는 우리가 혐오해 마지않는 더럽고 인지 능력을 상실하고 본능만 남은 존재로 우리를 동화시키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것이다. 영혼이 바뀐 인형은 체제의 가치관을 전복하고 스스로에게 동화시키는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실바니안 패밀리즘>은 정상가족의 젠더 모델 대신 소수자의 영혼과 정치를 담은 사물을 통해 우리 사회에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불러들이고, 새로운 소꿉놀이를 제시하면서 놀이를 통해 익숙해지는 가족관계를 성찰하며, 차이를 출발로 하는 다른 관계 맺기를 연습할 수 있는 역할극 놀이를 만든다.
그런데 표정과 제스처가 없는 인형 때문에 자유로워진 시선과 발언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화로의 안전한 피신 덕택에 주어지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표정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 표정이 존재하지 않는, 얼굴 없는 실바니안 인형들은 자유로운 동시에 어려움이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우화는 복잡다단한 사회의 문제들을 쉽게 벼려내기도 하지만, 이 우화가 어떻게 다시 구체적인 현실 속에 기입되는가의 문제에서는 또한 손쉽게 무력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우리가 현실에서 큰곰이나 좀비를 마주할 때면 대화할 생각보다는 마음에 우려 내지 회피가 앞선다면, 우화는 그런 심리적 현실에 어떤 식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와 그것을 파열시킬 수 있을까? 페미니즘 활동가와 비평가를 통해 소수자 정치의 실현 과정에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개인들이 어떤 공동체의 도움 없이 혼자일 때 개인의 사회적 발화는 다시 그들 각각에게 위협적인 현실로 돌아오고, 그때 운동은 용기와 힘을 잃는다. 우선은 전혀 안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제 몸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근래 미투 운동 등의 과정에서도 다시금 야기되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화와 풍자의 형식은 우리 사회가 비판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위협적이라고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얼굴을 가지지 않는 안전함은 역으로 안전하지 못한 사회, 혹은 투명하게 드러나기에는 너무나 많은 왜곡된 이미지만이 가시화된 사회를 증거한다.
기본적으로 퍼포먼스 기록 영상의 위치에 있는 카메라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커뮤니티와 시설의 고슴도치를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고, 따라서 그들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문제의식도 이 표정없는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어떤 순간에도 인형들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그 몸짓이 담백하다. 따라서 이 인형극에는 동정심 때문에 불쌍해지는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고, 폭력의 스펙타클에 대상화되고 희생되는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꼭두각시들에게서 감정보다는 문제를 읽게 된다. <실바니안 패밀리즘> 퍼포먼스는 매우 복잡한 대상화 과정에 작동하고 있는 소수자 이미지의 재현 및 가시적 존재로서 겪어야 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대신 스피커의 볼륨을 증폭시킨다. 인형극의 인물들은 모두 당당하고 거침없이 소수자들로서 발언하고, 인형극은 일종의 캠페인이 된다. 이 운동은 마치 구연동화가 이야기를 전달해주듯이 1인극의 청각적인 경험을 연출하면서 좀 더 명백하게 자신의 관점을 완성한다. 대사하는 목소리는 드라마를 연기하지 않는다. 감정적이기보다는 건조하고 쿨한 톤을 유지한다. 이를 통해 여러 소수자 이미지를 기존의 피해자나 약자 위치에 놓지 않으려는 의도와 노력이 강조되고, 풍자와 해학의 형식을 통해 인형극의 인물들은 건강한 존재로서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 꼭두극은 인형을 움직이는 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도달하는 이미지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과정에서 도출됨을 말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지란 무엇보다도 우리의 손, 즉 노동을 기반으로 도착하는 것임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재생되는 실바니안 패밀리가 예쁘게 장식된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의 환상을 재현한다면, <실바니안 패밀리즘>의 손은 열심히 움직여서 그 환상에 가려진 존재들을 바로 세워 보이면서 우리의 이미지를 재건설하고 있다. 자본이 집중된 이야기는 환상을 만드는 반면, 가난한 작가의 노동은 소수자 정치로 구현되는 사회를 생산한다. 미술작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작가로서 치명타는 이미지에 노동이 깃들어 있음을 이해하고 잊지 않는다. 이전 유튜브 작업에서도 이미지의 완성 과정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으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하며 살아가는 일상이 가진 분위기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손의 노동과 함께 완성되는 회화작업 속에서 진행된다. 이는 4.16 이후를 상상하는 과정에 대한 캠페인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어떤 사회를 상상해야 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은 어떻게 가시화되어야 하는가? 그 이미지는 우리의 노력없이 눈앞에 갑자기 출현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노동, 즉 우리가 직접 상상하고 움직여가는 운동 속에서 그 모습을 갖춰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매체 실천의 문제를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실바니안 인형놀이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각각의 콘텐츠뿐만 아니라 유튜브 자동 재생 알고리즘과 관련한 영상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나의 콘텐츠를 찾으면 이와 유사한 무한한 콘텐츠로의 이동을 반복하면서 말 그대로 숲 속에 사는 실바니안 패밀리 사이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유튜브 환경. 치명타의 <실바니안 패밀리즘>은 유튜브 콘텐츠를 염두하고 진행된 프로젝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단채널 순차 재생은 유튜브의 반복 재생을 우회적으로 성찰해볼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각 장은 하나의 완성된 단편들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의 연속은 무한반복 속에 길 잃은 반복이 아니다. 일화들이 진행되고 중첩되면서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가야 할 공통의 문제로 열린다. 실바니안 인형의 수집이 무한히 반복되지만 계속 만족없는 소비주의를 보여준다면, 치명타의 퍼포먼스는 이야기의 반복이 우리 사회를 성찰할 수 있는 힘으로 쌓이고 집중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실바니안 인형놀이들을 반복적으로 자동 재생되게 하는 유튜브 문화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 이미지로써 매체 실천적이다. 퍼포먼스란 일회적이고 장소특정적인 장르다. 퍼포먼스가 영상기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이러한 퍼포먼스의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퍼포먼스는 연속 재생되면서 반복될수록 우리의 문화에 더 많은 이야기를 돌려줄 것이다. 이 인형극은 계속 반복되면서 더 자주 소개될수록 우리의 이미지를 다시 건설하는 건강한 힘으로 쌓이고 축적될 것이다. /채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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