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현장/광장'의 미술
정은영(작가)
Make up Dash Installation, Seoul Art Space Mullae StudioM30, 2017 ⓒ사진 홍철기

유튜브의 '돌격(dash)'

  언젠가 친구의 9살 아들에게 여느 어른들처럼 무심히 장래희망을 물은적이 있다. 아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튜버'가 될거라고 했다. '유튜버'라는 단어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음에도 '장래희망'에 대한 답으로서의 '유튜버'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자못 당황했다. 아이는 자기가 존경하는 유튜버의 채널을 소개해주며 행복해했고, 아이패드의 영상촬영기능과 아이무비 앱을 이용해 스스로 만든 수십편의 놀라운 작업들을 보여주며 나의 피드백을 요구했다.
  어느날엔 한 대학의 강의중 학생 한명에게 이런 얘기도 들었다. "친구가 약속시간에 늦는다고 카톡을 보내도 크게 짜증나지 않는다.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되니까. 이채널 저채널을 옮겨 다니다보면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잦다." 카카오톡으로 시작된 시간의 지연은 유튜브를 통해 의미를 갖게되고, 애초에 소통의 도구였던 카카오톡 메신저는 소통부재를 조장한다는 역설이 매우 흥미로왔지만,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 학생은 자신의 작업 대부분에 유튜브에서 받은 클립들을 삽입해 편집하는 것을 즐겼고 '발견된 푸티지(found footage)'를 재구조화하는 흥미진진한 수작들을 학기 내내 보여주었다.
  적극적인 사용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 종종 화제에 오른 먹방이나 게임방송등을 보려고 유트브에 자주 머무른다. 다종의 분석할만한 '민족지'와 '텍스트'를 살피기 위해, 혹은 연구자료나 작업용 소스를 찾기 위해서도, 또 가끔은 때를 놓친 티비 프로그램을 보거나 관심있는 작가들의 현황이 궁금할때도. 이렇게 유튜브를 이용하다보면, 알다시피 현재 접근한 컨텐츠와 관련된 다른 컨텐츠가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된다. 이 알고리즘에 포획되어 무수한 컨텐츠들을 타고 한바탕 "인터넷의 바다"를 헤메이고나면, 어느새 수시간이 지나있기 일쑤다.
  사용자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검색'을 시작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이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이 원하는/ 원할것이라 추측되는 관심영역의 컨텐츠들을 줄줄이 찾아내 대기시킨다. 조금 더 적절한 정보에 도달하고자 할때, 어떤 '디지털 연산'으로든 우리에게 다다른 또다른 무수한 정보들은 멈출 수 없는 '클릭질'로 우리를 이끈다. 이런식의 '연결망Net'은 이미 물리적 세계를 가상, 혹은 사이버상으로 확대했고 이 공간은 이제 우리 삶의 주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인터넷환경의 속성은 우리가 가진 관습적인 감각, 사유, 행동패턴등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드는등의 다른 확장을 유도해왔을뿐 아니라 중요한 전환적 패러다임의 시대를 공표했다. 
  셀수 없이 많은 유튜버/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은, 각각의 컨셉을 가지고, 각각의 정보를 제공하며, 특정 즐거움과 특정 컨텐츠를 유통하는 기획자이자 창작자, 혹은 엔터테이너이자 CEO이며, 이전에 호명된 적 없는 그 무엇이고 광활한 넷상의 알고리즘의 무수한 확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용하는 이들이다. 치명타의 새로운 프로젝트 <메이크업 대시(2017)> 역시 우리 시대의 실천이 매우 자연스럽게 생산되고 머무르고 또 이동하는 유튜브라는 가장 대표적인 인터넷 플랫폼을 의도적으로 전유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어느날 또다른 인터넷 플랫폼인 페이스북을 통해 스스로 내 앞에 당도했고 당연한 관심을 끌었다. 의도치 않게 '제공된' 이 컨텐츠는 따라서, 내 입맛에 맞는 어떤 정보들을 '값'으로 받아들여 연산한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하나의 관계적 조합속에서 내게 가시화된 것이다. 재현, 미술, 미디어, 인터넷, 여성, 젠더, 페미니즘, 현장, 사회, 정치 따위의 의미망속을 질주하면서.  
인터넷이라는 광장, 혹은 현장

  치명타라는 작가의 존재를 알게된 것도 애초에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통해서였다. 2016년 여름, 소위 '페친'이라 명명되는 몇몇 작가들이 '공간 해방'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 관한 정보를 포스팅했고, 이 정보는 '뉴스피드'를 통해 노출되었다. 그의 개인전 제목 또한 공교롭게도 <뉴스피드(2016)>라고 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해 잠시 지역에 체류하던 작가는 그간 연대하던 점거현장에 방문하는것이 어려워지자, 현재적 관계와 사건에 대한 정보를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통해 수집하는 것으로 대신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고 그것을 드로잉으로 양식화한 작업들로 이루어진 전시가 바로 공간해방에서의 개인전 <뉴스피드>였다. 작가의 행보나 각 드로잉 이미지의 디테일, 그리고 전시장에서 이루어진 어떤 움직임과 목소리의 울림마저도 생생하게 현재화하고 실재화하는 구체적인 정보들이 자주 내게 도착했다. 매우 사려깊고 정치적인 전시로 보였기 때문에 직접 방문하고 싶었지만 사정상 그러지 못했음에도,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는 통상 전시장에 방문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정보와 감각을 거의 고스란히 전시장 바깥으로 실어 날랐다.
  그의 드로잉들은 형식적으로는 비교적 전통적인 미술양식을 답습하는 듯 보이지만, 인터넷환경과의 연쇄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 관습으로부터 조금 빗겨나 있다. 불가능성을 일종의 불가결성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인터넷환경에서의 능동성은 동시대 시/공간적 사유와 감각의 근거지를 넓히는데에도 한 몫 한다. 나아가 실제 광장이었다면 더 큰 목소리에 눌려 어쩌면 들리지 않았을 다종의 목소리를 대리하기도 하는 페이스북 뉴스피드의 민주적 지평위에 공간의 물리적 거리를 개념적으로 좁혀 겹쳐낸다. 시각적 재현으로 세심하게 번역된 작가의 이러한 감각과 태도는 현장에 연대하는 소위 '현장 예술가'로서의 소임을 포기하지 않기위해 고안된 것이다. 인터넷 환경은 그의 작업에서 내용적 근거를 지지할 뿐 아니라, 거리에 대한 물리적 감각을 수정하기도 하며, 재현과 윤리의 상호적 동역학을 작동시키기도 한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정권교체의 요구를 개진하던 지난 수년간, 광장을 뒤덮었던 들끓는 목소리는 실제로 정권교체를 이끌어냈으며, 그 실천의 방식은 일부 "운동권"이라 불리우던 소수집단의 것에서 매우 보편적인 양태로 이해받게 된 듯하다. 특정 공간을 점유해 이른바 '투쟁의 현장'을 만들어 존재를 드러내는 운동의 양식은 이제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전환을 위한 방법론으로 이용된다. 광장의 힘에 부여된 권위와 정치적 목표 역시 양쪽 모두에게 동일하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고, 가끔은 현장을 유지하는 철학과 그곳에서 들려오는 구호의 언어마저 유사해졌다.
  한편, 이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현장을 수호하는 지지세력 결집을 효율적으로 이루기위해 유튜브나 카카오톡,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디지털 미디어의 매체성과 접근성을 이용하게 된 점도 두세력 모두에게 동일하다. 인터넷 공간이란 이미 물리적 광장의 넓이와 부피를 완전히 초과하는 가장 뜨거운 정치투쟁의 격전장이자 동시에 예리한 무기가 되었음은 이제는 거의 기정사실이라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유튜브라는 플랫폼 역시 치명타에게 하나의 사회적 현장이며, 연대의 물리적 공간인 광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이 공간에 무리없이 녹아드는 소극적 이용자/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이 현장/광장이 작동하는 관습을 익히고 그것의 한계를 넘거나 그 규칙을 거스르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인 '크리에이터'가 된다. <여의도-로잉 (2016-2017)>이라는 프로젝트에 성실하게 참여하면서 익히고 구현해왔던 '현장-미술'에 대한 그의 사유와 이해는 <뉴스피드>로 이어져 매우 숙련된 형식안에 자리잡았고, <메이크업 대시>에 와서는 유튜브라는 플랫폼 자체를 '현장화' 시키고 '미술매체화' 시킴으로써 작업의 근거지를 넓히는 한편, 현장성을 다시 개념화 하고 미술양식의 관습에서도 한발 넘어서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동시대 미술현장의 무한히 확장적인 개념들 안에서 유튜브라는 매체적 특징을 이용하는 것을 두고 새로운 형식적 도전이라 마냥 상찬할 수 만은 없다. 더우기 유튜브를 포함한 다양한 플랫폼의 미술적 도입이나 융해는 현대미술에서 매우 잦은 사례로 꼽힌다. 그럼에도 치명타가 사용하고 있는 유튜브 플랫폼이 보다 특별하게 의미화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이 플랫폼과 관계하는 수많은 정치사회적 동역학을 문제삼으며 그것으로 부터 감각한 '현장', 그리고 '현장-미술'의 다른 미학적 양태를 기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위 '민중미술'의 '포스트인터넷' 세대적 해석이라해도 무리한 비약은 아닐것이다.

화장하는 페미니즘?

  따라서 치명타의 작업은 언제나 현장의 동학속에서 미술의 존재이유를 진지하게 묻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예술적 참여와 실천의 노력으로 보인다. 지속되는 그의 실천은 미술이, 혹은 자신과 같은 미술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숙려의 동력이기도 했다. "현장 드로잉"이라는 방법론이 '뉴스피드'에서 수집된 현장성을 기록/재현하는 것으로 연장되고, 또한 온갖 당대적 '현장성'이 살아 숨쉬는 아카이브인 유튜브로 움직일때, 작가는 그가 집요하게 질문하고 있는 사회적 이슈와 작업의 핵심적 관점을 또한 조금씩 이동시킨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메이크업 대쉬>는 그러므로, 근 몇년간 인터넷이라는 현장을 가장 들끓게 했던 '젠더전(gender戰)'이라 호명될법한 성별이 근거가되는 '혐오'라는 특수한 현재적 정동에 닿아있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유튜브 메이크업 방송'이라는 "여초" 컨텐츠가 어째서 동시에 가장 젠더규범에 충실한 컨텐츠가 되었는가이다. 작가는 이 질문을 다시 심화하고, 이에 답하기 위한 페미니스트 관점을 꼼꼼히 공부한다. 물론, 기존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제공하는 수많은 정보와 그 정보가 제공되는 관습적 매커니즘을 충실히 학습하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메이크업이라는 문화코드에 깊게 새겨진 젠더 이분법과 고정관념, 그리고 그것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억압의 기제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컨텐츠를 고안하는데에 충실한 시간을 쓴다.
  따라서 <메이크업 대시>는 메이크업 유튜브방송의 규칙을 충실히 학습하지만, 또한  그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있다. 규칙을 수행하는 듯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천연덕스레 그 규칙을 깰 뿐 아니라 그것을 낙후시키는 것이다. 예를들어, 여성 메이크업 유튜버들의 단골 인기 컨텐츠인 "남자친구가 해주는 메이크업"을 그대로 실천하는척 하면서 남자친구와 느닷없이 한국사회에서의 여혐문화에 관해 토론을 하거나, "남자친구가 더빙한 메이크업" 방송을 "메알못"인 "여자친구가 더빙한 메이크업" 방송으로 패로디해 메이크업 정보라는 컨텐츠의 이면에 숨겨진 요지부동의 성별규범과 역할을 문제화하고 교란하는 식이다.
  메이크업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양산하는 컨텐츠는 거의 대부분 젠더억압의 기제들을 딛고 존재한다. 여성의 화장은 언제나 남성을 의식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들의 여성성을 더 여성적으로 만들것이라는 환상이 마치 여성들 스스로 구성한 자율적이며 자발적 욕망으로 부터 기인한 것임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나아가 여성에게 화장이란 그들의 특권이자 훈련되어야만 하는 기능임을 맹신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젠더규범의 강요는 화장을 모르는/하지않는 여성들을 교묘하게 꾸짖고, 간혹 등장해 인기를 끄는 남성 메이크업 유튜버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를 조장하고 정당화하는데에도 이용된다.
  치명타는 그의 채널을 구성하는데 있어 기존 메이크업 유튜버들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목표로 그 반대항에 위치하는 손쉬운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보다 사려깊고 지혜로우며 미련하도록 성실한 방식을 선택하는데, 유튜브 플랫폼 생태계의 역동성을 존중하면서 그 내부에 독자적인 위치를 마련하고자 매우 정직하게 차곡차곡 자신의 컨텐츠를 제작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그의 유튜브 컨텐츠는 2017년 3월 18일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7분 57초짜리 인트로방송을 시작으로 전시를 마감한 11월 28일까지 무려 25회의 방송과 2회의 라이브 방송으로 제작됐다. 짧게는 3분여에서 길게는 20여분에 달하는 각 방송들은 매 회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자신과 사회를 사유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각 회차를 미술적 관습에 따라 한점의 '단채널 비디오'라 칭할 수 있다면 그 작업의 내용과 양, 나아가 그 노출도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통상적인 수준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흔히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튜브 크리에이터로서의 생존은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경쟁속에서 극단의 노동과 비용,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들의 컨텐츠는 철저하게 구독자들의 구미를 따를 뿐 아니라, 보다 많은 노출을 위해, 보다 선정적이고 보다 기이한 소재에 탐닉하게 된다. 치명타의 유튜브 채널은 이 극단적 커뮤니케이션 자본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자신의 미술적 전략과 현장참여의 소임을 매순간 밝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전시장에서 최초로 공개한 두 점의 공들인 작업은, 일정기간 유튜브 플랫폼에 머무르며 성실하게 학습하고 단련한 노하우에 기존의 메이크업 유튜버들이 지향하지 않는 비규범적 컨텐츠를 담아내어 더욱 빛난다.
  한편은 동료작가인 김화용과 흑표범이 협력한 드랙킹 메이크업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듦을 화장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이 컨텐츠 자체가 전에 없던 새로움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와 대화, 그리고 매우 정치적인 관점을 화장의 미학과 교차시키는 섬세한 텍스트를 만들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더 아름다워 지기 위한, 더 젊어보이기 위한, 더 여성스러워지기 위한 반복적 행위, 이것을 더 잘 수행했을때 비로서 얻어지는 '여성'이라는 젠더는 누구의 이름인가? 왜 우리는 이 젠더의 수행을 늘 생득적이며 변할 수 없는 단단한 본질이라고 생각하는가? 치명타는 자신의 여성경험이 확장하고 연대하는 더 많은 신체의 표현들을 재현하면서 작가 스스로에게도, 관객에게도 성별에 관한 더 많은 질문과 성찰을 이끌어낸다.
'느린' 그림의 용기

  치명타는 아마도 <메이크업 대시>라 명명한 이 유튜브 프로젝트를 곧 마무리 지으려는 것 같다. 애초에 단기적 실험으로서의 제한적 목표를 가진 프로젝트였기도 했을테지만,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제 다시 '물리적 운동의 공간'으로서의 현장/광장이 그리워진 눈치였다. 유튜브라는 '사이버 현장'에서의 숨가쁜 경험과 실천은 오히려 그의 작가적 근거를 다져왔던 현장에서의 실천을 더 깊게 고민하도록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그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다.

"[...] 왜 현장일까. 작업은 흔히 어떠한 사건이 벌어진 후에 이루어진다. 동시에 존재한다기
보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추후에 작가가 해석하고 묘사함에 따라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사건과 동시에-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하길 원하는걸까? 그건 정말
동시에 이루어지는 작업일까? [...] 그림은 너무 느린 도구다.[...]"
그림의 '사후적' 재현이라는 그 불변의 속성이 '너무 느린'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오히려 조금 느리게 뒤따르는 이 시간의 지연안에서 우리는 그림의/작업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현장성'이 즉 '동시성'이여야 할 합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동시적이라는 감각은 특정 맥락에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어떤 힘센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동시적 순간에서는 결코 발견되거나 사유되지 않는 것들이 시간의 지연속에서 차츰 시각언어로서의 의미의 두께를 찾아갈 때, 우리는 그 과정을 이르러 예술적/미학적 사유라고 칭한다. 그 과정을 거쳐 도달한 재현이 굳이 '동시적' 시간성과의 관계에서만 논의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림은/작업은 문제적 순간/사건과 얼마간의 시차속에서도 충분히 시의적이며, 가끔은 어떤 행위보다도 신속하게 사건의 의미망을 열어제치고 확장해 내기도 
했다. 
  물론 작가는 매순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질문하는 이들이다. 치명타 역시 언제나 자기한계를 질문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실천을 수행함으로써 꾸준히 작업경력의 축적물을 쌓아왔다. 묵묵히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작가가 돌연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시끄럽도록 전달하는 작업으로 전회하는 용기를 내는 것, 끝내 전달되어야만 할 메세지를 외면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것, 현장에서의 작업을 추동하는 그 현장의 정의와 정치들을 선명하게 인지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연대의 마음을 잃지않는 것, 이와같은 그의 일련의 작업을 향한 신중하고 힘찬 실천의 움직임은 아마도 쉬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이 단단한 마음을 가진 '현장 미술가'의 남은 행보가 여전히 궁금한 이유다. /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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